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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본다는 것

꿈꾸는깽이 2012. 12. 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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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본다는 것

빅터 버긴(Victor Burgin)| "Looking at Photographs | 번역 : 이영준

 


글로 쓰여진 것을 보지 않고 하루도 살 수 없듯이, 사진을 보지 않고 하루를 산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러저러한 제도적인 맥락─언론, 가족스냅, 광고─을 통해 사진은 환경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형성하고/ 반영하고/ 변화시킨다. 사진의 일상적인 도구성은 아주 명백한데, 그것은 팔고, 알려주고, 기록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도구성이 분명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사진적 재현이 보통의 세계, 바로 그 사진적 재현이1 만들어낸 세계 속에 묻혀버리는 점에 한해서만 분명하다. 최근의 이론은 사진이 “설명할 것 없음”이라는 영역속에서 그 작동방식을 감춰버린 영역 너머까지 사진을 따라간다.
예전에는 사진을 ‘예술’에 비추어서 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교육기관의 타성을 탓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사진의 일상적인 경험이라는 더 큰 부분에 그림자를 드리워 감춰버리는 빛의 원천이었다. 가장 많이 서술되는 이야기는 카메라의 발명이 불러 일으킨 ‘미술사’의 독특한 뉘앙스인데, 그것은 일련의 ‘거장들’, ‘명품들’, ‘운동들’이라는 친숙한 테두리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한 사진의 사회적 사실은 대체로 건드리지 않는 부분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회화와는 정적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고, 영화와는 카메라를 공유하고 있는 사진은 이 두가지 매체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사진을 이 두가지 매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마주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회화와 영화는 시간과 돈을 쓰게끔 하는 자발적인 행위의 결과로만 보이지만, 사진은 화랑에서 전시되거나 책으로 팔린다고 해도 대부분은 일부러 선택하여 보는 것이 아니며, 사진을 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나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진은 분명히 공짜로 볼 수 있는 듯이 보인다. 즉 사진은 무료로 제공된다. 회화와 영화는 비판적 시선에 대한 대상으로 제시되지만 사진은 환경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진을 소통시키는 사람들간에도 별로 언급되거나 이론이 덧붙여지는 일 없이, 무료로 친숙하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진은 언어의 속성을 공유한다. ‘사진의 언어’에 대해 느슨하게나마 얘기한 것이 오랫 동안 흔한 일이었지만, 자연언어 이외의 소통의 수단에 대해서 언어학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체계적인 조사라도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와서의 일이다. 그런 초기의 ‘기호학적’ 연구와 그 결과는 사진 이론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호학 혹은 기호론은 기호에 대한 연구인데, 그 목표는 의미가 생겨나는 체계적인 규칙을 밝히는 것이었다. ‘구조주의적’ 기호론의 초기에는 (롤랑 바르트의 <기호론의 요소들>은 프랑스에서 1964년에 처음 나왔다2) ‘자연’언어(말하기와 글쓰기 같은 현상)와 시각적 ‘언어’ 사이에 비슷한 점을 찾는데 관심이 모아졌다. 이 시기의 연구는 사진이 이 세계 속의 사물을 지시하는데 쓰이는 유사성의 코드, 지시된 의미가 2차적인 의미의 체계가 되는 함의의 코드, 사진 속의 요소들의 병렬과, 연속한 다른 사진들 사이에 나타나는 요소들의 병렬에 덧붙는 ‘수사적’ 코드를 다루었다.3 의미론의 연구결과는 (영어로 된 모든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영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진들이 의존하고 있는 사진의 ‘언어’, (기술적 장치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단일한 의미체계는 없으며, 사진이 끌어 올 수 있는 코드들의 이질적인 복합체가 있을 뿐임을 밝혔다. 각각의 사진은 이런 코드의 다양성에 토대를 두고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 코드의 숫자와 유형은 이미지마다 틀리다. 이중 어떤 것은 (적어도 일차적인 분석에 있어서는) 사진 특유의 것도 있으며,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신체의 몸짓, 표정 등에 관한 코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율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사진의 언어’는 언어 자체의 결정요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는 설명이나 제목이 붙어있지 않은 채 사용되는 사진은 거의 볼 수 없으며, 긴 글이 딸려 있거나, 그 위에 글의 카피가 덧붙여진 사진을 더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아무런 글이 덧붙여지지 않은 사진 조차도 그것이 보는 이에 의해 ‘읽혀질’ 때는 언어에 의해 관통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을 가진 사진은 사회적으로 어둠에 덧붙여지는 의미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우리가 기분이 안 좋은 사람을 은유적으로 ‘우울하다’고 하듯이, 사진을 해석하는 요인들은 언어적이다).
사진을 알아본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사진은 ‘사진적 담론’이라는 차원에서 쓰여져 있는 텍스트이지만 이 담론은 다른 담론들 처럼 그 너머에 있는 다른 담론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진적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 처럼 복잡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가진 영역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인 지점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 이전의 다른 텍스트들이 죽 겹쳐져 있는 것이다. 사진이 전제로 하고 있는 이런 이전의 텍스트들은 자율적이다. 그들은 실제의 텍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만 그 속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텍스트에 대해서는 몸을 숨기고 있으며, ‘징후적으로’만 읽혀질 뿐이다 (사실, 프로이드의 글에 나타난 꿈에서처럼, 사진 이미지는 간명하다. 사람들이 그 효과를 다듬어서 광고에 사용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기호학은 사진을 대상-텍스트로 취급하여, ‘순수하게 시각적인’ 이미지는 낙원에서나 있을 수 있는 허구일 뿐임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이에 덧붙여서, ‘이미지’의 차원에서 사진에 덧붙여질 수 있는 특수성은 이미지와 그 의미를 의도하는 사회적 행위의 특수성 속에 꼼짝없이 묶여 있다. 보도사진은 역사적 연속의 가공되지 않은 연속성을 ‘뉴스’라는 생산물로 전환하며, 가족사진은 그 특질상 가족이라는 기구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한다. 사진을 다루는 어떤 행위에 있어서도, 주어진 재료는(역사적 연속, 가족 생활의 실존적 경험 등) 특정한 기술적 방법을 쓰고 특정한 사회적 기구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생산물의 유형으로 전환된다. 초기의 기호학이 사진에서 찾아낸 의미있는 ‘구조’는 스스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조직의 독특한 유형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의 문제는 저자/독자라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구성체와 연관하여 생각되야 하는 것인데, 그 구성체는 실제로는 동시에 공존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별개의 담론들을 통해 다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심리분석은 기호학이 역사적 결정과, 의미의 생산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를 파악하는데 가장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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